스님, 선이 대체 무엇입니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낯설기만 했던 참선(參禪)이란 단어가  이젠 불교인은 물론 불교권 밖의 사람들에게도 아주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시내 한복판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민선방(市民禪房)이 늘어나고 있고 기업체나 공무원  연수과정에 선(禪)  강의가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등장하였다.  


참선은 이미 불교인 것만이 아닌, 불교를 모르거나 불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금번 본지가 선을 이론쪽에서보다는 실수(實修)하는 과정의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정통선을 행하고 계시며, 선방수좌들 사이에 존경 받고 계시는 고 정일(高 正日)스님과 의 대담을 마련했다.  스님의 여러 차례 사양끝에 어렵게 마련되어진 본 대담이  참선하시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오랜 시간 대담에 응해주신 정일스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주



스님, 선(禪)에는 이런저런  여러 이름들이 많습니다.   우선 이것에 대해 잠깐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선의 종류는  크게 최상승선(最上乘禪),  대승선(大乘禪), 소승선(小乘禪), 외도선(外道禪)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선이라 함은 일체 미세한 망상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 가운데서 일체 헐떡임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최상승선 즉, 화두선(話頭禪)은 일체 헐떡이는 그런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며, 화두 자체가 본연 그대로인지라 자기 본래 면목이라고도 하고 깨달음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소승선은 관념을 통일해서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이것은 큰 고뇌만 항복 받아서 들어가는 경지고 세밀한 번뇌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요,  대승선은 최상승선과 소승선을 합해서 행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외도선은 뭐냐, 그것은 나름대로 정신이나 생각을 통일하는 면도 가지고 있지만 소승도 대승도 아닌 일체 근본자리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것은 선(禪)이라고 이름할 수도 없는데, 요즘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선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다 이 외도선에 해당하는 것 같더군요.

 

최상승선의 구체적인 의미와 최상승선을  행해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요.

최상승선, 공안선, 화두선은 표현은 다르지만 다 같은 뜻이 됩니다.  최상승선은 본래 갖춰져 있는 자기본성을  깨달아 우주와 자기가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 가는 거지요.  최상승선은 처음부터가 언어도단인 것처럼 말과 일체 행으로써 그 자리를 조금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안(公案)의 일구(一句)를  표현하는 자체가 벌써  상신실명(喪身失命)이라고 해요.  일구는 그 본연의 다  갖춰진 자리를 말합니다.  그 근본자리는 혀를 댈 수도 없는  자리예요. 

최상승선은 일체 미세한  망상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옛날  고인의 말씀에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한문 배운 사람이나 강원에서는 '이 문안에 들어 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이렇게  멀리 해석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이 말은 '이 문은 일체 알음알이가 붙지  않는 문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곧 공안화두는 '일체 그런 알음아리가 붙지 않는 선(禪)이다' 라는 뜻이지요.  정신차려서 이 문제만 바로 추구하도록 해라. 그러면 망념이 부서질 테니까.  또 '화두만 바로 해라' 이거지요. 최상승선을 공부하는  방법은 [이 무엇인고?是甚 ]하면 됩니다.   '이-', 할 때 생각이  일어나죠?  생각을 일으키는 그  놈이 무엇이냐, 그거예요. 

그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체이며, 우주 시방세계를 다 집어삼킨 존재거든.  자꾸 되풀이하면 전후 생각이 끊어져야 해요.  그게 바로하는 거라.  앞 생각도 끊어지고 뒷  생각도 끊어지고 알 수 없는 것 하나에 몰두하는 겁니다. [이 무엇인고]하는 것은 본래 자기가 자기를 찾자는 자세지요.  평생 자기 몸을 끌고  다니면서 그 몸둥이의 주인을 모르고 사니 참 어리석은 거지요. 또, 1700가지 화두 중 하나만 들어도 돼요.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무'.  불성자리를 그대로 표현한 화두입니다.  조사스님이 어째서 [무]라  했는가.  그 조주스님 뜻만  찾으면 돼요.  생사심(生死心)만 없으면 바로 볼 수  있어요.  상대적으로 일어나는 일체 관념의 세계를 초월해, 자신을 찾아 보려는 자세를 가지고 궁구해 들어 가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생사관념을 없애야 한다고  하셨는데, [생사관념]하면 굉장히 어렵게 들립니다.  관념을 어떻게 떨어버려야 하는 지요?

다른게 없어요. [이-무엇인고]하면 됩니다.  1700가지 화두중에서 하나를 든다.  예를 들어 부처를 물었는데 '마삼근'이라고 했다든지.  '마른 똥막대기’하고 한 본연의  자리를 바로 제시한 이런 공안을  궁구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일체의 미세망상을  항복 받을 도리가 없어요.  이러한 공안을 바로 들면 일체관념을 떨어버릴 수가 있고, 어려운 일이 없어요.


[공안을 바로 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지금 우리가  일으키는 상대적인 생각을 버리고,  절대성의 공안에 철저히 부딪쳐 보는 겁니다.  진리에 부닥치려고  할 때 상대 망상이 붙을 수가없지요.  진리란 바로 여러분 자신을 말합니다.  자신을 찾으려는 자세를 가지고 나아갈 때 상대 망상이 무너져 버리고  관념이 붙지 못해요.  부처님께서 대중의 근기에 맞추어 소승선, 대승성을 놓았지만 좀 어렵더라도 최상승선에 부닥쳐 보는게 좋읍니다.


[공안에 부닥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내면적인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과정이란 다른게 아니예요. 

[이-무엇인고]하는  자세, 곧 평생 자신이 끌고 다니는 자기를 찾으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내가 무엇인고]하는 관심을 가는 것입니다.  [이-]할 때 생각을 일으키는 그게 뭐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것만 자꾸 하면 됩니다.  처음에 화두가 의심이 안되면 숫자를 거꾸로 세어서 내려가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 않게 한 다음 다시 공안을 들고 절대성의 진리 자리에  부닥치면 그대로 무너져 버려요.  진리, 그 길을 향해서 바로 부딪치려고 하면 상대망상이 무너진다.  그걸 강조하고 싶어요.  요즘 선에 관한  서적을 보면 [선]을 모두 방편이라고 했더군요. 전혀 맞지 않는 말이 예요.  최상승선은 일체 관념이 붙지 않는 절대적인 그  자리를 이른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최상승선이요, 화두선이란 언어조차 일체 붙일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대승선은 이름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조그마한 개념과 생각이 붙으니까.  그러므로 대승선이나 소승선은 방편선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념에 의해서 들어가는 방편선을 다급히 익혀 거기에 머물고 말지요.


보통 [선]하면 좌선(坐禪) 하게 됩니다.  또 좌선을 제대로 하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된다고 하는데, 좌선을 통해서 얻어지는 정신적인 영역은 어느 정도가 되는지요?

고인(古人)의 말씀을  빌면, [좌(坐)]라는 뜻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 즉 미세 망상도  동요함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선(禪)]은 일체 미세 망상도 일어나지 않아서 헐떡임이 없는  경지를 말합니다.  [좌]는 체(體)가 되고 [선]은 용(用)이 되는 거지요.  좌선이라 함은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서 임의 자재하는 경지입니다.  그러니까 [좌선]이란 말 자체로 다 해 맞춰진 겁니다.  그런데 하긴 멀 합니까? 그러므로 [좌선한다]라는 말은 쓸 수 없어요. 

말이란, 본래 말만 내면 근본과는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좌선(參禪)한다]는 말도 나오게  된거지요.  굳이 말을 붙여 바르게 표현한다면 [참선한다]는 표현이  맞아요.  선을 모르기 때문에 궁구한다는 것이 [참선]이거든요.   경허스님께서 '법문(法問)한다고 하는 것은 술취한 사람이 하는 소리지' 그런 표현을 하셨어요. 참 멋진 말씀이지요.


초심자들이 참선을 할 때의 [좌법]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그리고 조심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좌법은 오른 다리가 밑으로 가고 왼쪽 다리가 위로 올라가게 하고 손도 그와 같게 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귀가 어깨와 나란히 하게 세우고, 코는 배꼽과 나란히 하게 되면 바른 자세가 됩니다.  그리고 아랫배 단전(丹田)에 힘을 주고 아래 윗니를  자그시 물고 혀끝을 입천장에다 대고, 항문도 입을 다물듯이  닫아야 해요. 항문을 닫아야만 오래 앉는데 있어서도 치질같은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평소 앉는데 있어서도 항상 항문을 닫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병을  막아 낼 수 있지요. 또 조는데 있어서도 아래 윗니를 지긋이 물고  있어야  이가 상하지 않아요. 입을 벌리고 있게 되면 사흘만 졸아도 벌써 치근이 상하게 됩니다. 그 때 엿같은 것을 먹으면 이가 다 묻어나 버리게 돼요.  대소변을 볼 때도 아래윗니를 자그시 물고 있으면 신장을 보호하게  됩니다.  이런 것은 참선을 하지 않더라도 건강문제이니까 염두에 두고 있어야 좋습니다.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을 한다는게 대단히  고통스럽고 어렵다고 들 합니다. 고통스러워도 인내를 하는 것이 수련이라  할 수 있는 지요?

옛날엔 어려서부터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것을  익혀 왔기 때문에 좌선할 때의 자세가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요즘은 앉는 것도 외국식대로 하다 보니까 꽤 힘들어 하는 것 같더군요.  그러나 처음엔 힘들더라도 건강에도 좋은 자세니까 좌법 정도는 익혀야 한다고 봅니다.  인도의 요가들도 다 이 좌법을 익혔어요. 그러나 최상승선을  하는데 있어서는 꼭 앉아서  행(좌법)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많은 고인들이 좌법으로 힘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그것을 많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은 반드시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관심만 가지면 되는 겁니다. 선에 관한  책을 보면 좌선할 때의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전에 힘을 준다던  지, 몸을 이완시키면 저절로 단전으로 힘이 들어간다거나  단전에 힘을 담뿍 주어야 된다는  그런 표현들이지요. 


그리고 요즘 선과 관계없이 단전호흡에 관심이  많은데 거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요.

단전호흡이라고 하는 것은 최상승선을 바로  해나가는데 있어서 몸을 조절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  단전(丹田)에 대해선 최상승선을 익히다 보니 큰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그래서 세밀하게 애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선도(神仙道)에서는  단전을 해서 얻은 힘으로 도(道)를  삼아 건강을 유지 할 수 있지만,  진리를 깨달을 순 없어요.  단전호흡을 해서 힘이 나니까 축지법을  하고 또 그것을 도(道)라고 하는데 그것은 도가 아니예요. 

 진리를  깨달아야만 도인데,  진리가 없으니까 단전호흡을 해도  일초 동안에 수없이 움직이는 생멸심을  조금 쉬게는 할지언정, 다 쉬게해서 본래 진리체인 자기 면목은 볼 수가 없어요.  도술과 요술의  차이가 여기서 납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깨달아서 힘이 나는 것을 도술이고,  자기 본래 마음을 깨치지 못한 분상에서  큰 힘이 난다는 것은 요술이다.  관념의 세계를 초월해서  생기는 모든 힘을 도술이라고 합니다.  불법중에서도 부처님 1200 제자가 소승선을  얻었는데, 부처님 문중에서도 그건 불법외도라고  해요.  자기 본연을 못 깨달은  분들이기 때문에 불법에서도  외도라고 하는데, 하물며  세상에 있는 외도들  분상이야 더 말할 게  없지요. 

생사해탈도 아니고 윤회를 면하지  못하고 관념의 세계를 그저 조금  통일해 가지고 조그만 힘이 생기는 것을  도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외도지요.  그러니까 안으로 자기 자신이  절대성인 진리체인지를 모르고 자꾸만  바깥으로 뭐가 있다고 믿는 그런 무리들을  말하는 겁니다.

 

 근래에 우리 나라에  많은 큰 스님이 계셨고 인도에도 많은  부류들이 있는데 각기 성품이  다르지 않았습니까?  결혼을 해서 수행을  하시는 분도 계시고, 수행풍토들이 다른데 이러한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지요?

참으로 근본을 보았다면  각각 다른 생활을 해도 상관이 없지요.  비구가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은 빨리 성취해야겠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세속생활을 하게 되면  끄달리는 것이 많으니까 부처님께서도  빨리 성취할려거든 출가하여 일념으로 나아가라고 독신과 결혼을  분류하셨어요.  깨친 눈으로 보면 이  우주법계 모든 법칙이  해탈법, 생사(生死)없는 법뿐, 일체  고해가 없는 법인데 무슨 결혼에 거리고,  여타 다른 것에 걸리겠습니까?  이미 얽매임이  없는 자재함에서 수행하느냐,  얽매임 속에서  수행하느냐 이 차이점이겠지요.


옛 선사님들 중에서 독특한 수행을 해서  견성하신 분이 계시면 말씀해주시지요.

우리 나라에 훌륭한 선사스님은 수없이  많지만 최상승선을 행하신 신라때의 부설거사 애기를  하지요.  부설거사께서 절에서 스님을  하다가 도반 스님 세분과 산중 토굴에서 한 십년간 용맹 정진을  하고자 길을 떠나는 중에 시장가의 단월집(신도의 집)에 들어 가셨다고 합니다.  마침 그 집에 20년간 벙어리 노릇을  하던 무남독녀 딸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딸이 스님을 만나고 나서 말을 하게 되고, 스님아니면  못살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니 그 부모가 어떻겠어요.  그래서 그 처녀의  부모가 스님에게 매달려서 우리가 오직 이 딸만을 바라고 사는데 스님이  떠나시면 목 매어 죽겠다고 그릅니다.  저희  세 식구를 살리시럽니까, 아니면 스님 뜻만을  위해서 산중으로 가시렵니까? 물었어요. 그렇게 해서 부설거사께서는 그  집에 머물러 그 처녀와  결혼하고 남매를 낳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같이  길을 떠나던 다른 두분 스님네는  산중에 가서 공부를 했지요. 몇 해가  지나자 부설 거사는 최상승선을  익히던 분이라 그 공부를  잊을 수가 없었어요.  

살림을 하는 중에도  공부를 익히고 있었지만  용맹스럽게 하기 위해서 방  하나를 정했어요.  식구들에게는 꾀병을 빙자하고 산중의  도반 스님들에게 뒤지지 않고자 죽지 않을  만큼 먹고 방에서 혼자 용맹정진을 했어요.  그렇게 한 10년을 마치자 도반스님들이 찾아왔어요.  부설거사가 그 스님들에게 내기를 하자고 그랬어요.  그간 공부한 것을 탁마하자 그거지요.  부설거사가 이렇게 문제를 냈어요. 

병에 물을 담아 천장에 매달자. 그런 다음 각자 자기 병을 치되, 병만 떨어떠리고 물만 매달리게  합시다. 그리고 나서 각기 병을 치니 다른  두 분 스님의 병은 물이고 병이고 다 쏟아졌어요. 그러나 부설거사의 것은 병만 떨어지고 물은 그대로  매달려 있었답니다.  견성만 한  것이 아니라, 그런 힘을  낼 수 있는 경지에까지  들어간 거지요.

아들 딸까지 낳고도  열심히 정진해 최상승선을 행한 분이었지요. 부설거사께서는 그 후  두분 스님네는 물론, 아내와 자식들에게  토굴을 지어주고 공부를 시켜서 견성시켰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견성을 해  생사 없는 이치를 깨달았던 예가 되지요.


선하면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  묵조선, 간화선 그러는데  묵조선 하는 법이 따로  있는게 아니예요.  참으로  묵조는 일체 번뇌가 없는 것을  묵이라고 합니다. 잠잠하다는 뜻의  잠잠 묵자 거든요.  참으로 잠잠  하려면 일체 미세망상도 없어야  한다 그거지요.  

중국의 오종(임제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 조동종) 가풍이 벌어졌을 때의 [묵조]는  간화나 다름이 없는 묵조였어요.  후에 대혜(大慧)스님이 묵조를  사선(邪禪)이라고 한 것은  옳은 묵조를 친 것이  아니라 삿댄 풍조에 떨어진 묵조를 말한  거예요. 

 조동종의 종정스님인  천동굉지선사(天童宏智禪師)가 묵조명(照銘)이라는  책을 지어, 첫번째가 묵이상조(而常照) 이렇게 나가니까  그 분을 잘못 오인해서 요즘 사람들이 묵조사사배(照師邪輩)의 종장(宗長)을  만들었어요. 안목이 시퍼런 도인 스님네를 묵조사사배의 종장을  만들어 놨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안목이  밝지 못한 요즘 사람들의 큰 잘못이예요. 대혜스님이 주장한 것은 굉지선사의 묵조를 친 것이  아닌데, 요즘 사람들이 묵조선하면 대혜스님이 [묵조사선]이라고 한 표현만을  생각하고 또 굉지선사가 처음부터  묵조사선을 주장했다고 여기고  있어요.  묵조선을  이렇게만 알고 있는 이 점을 시정해야 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죽은 선(死禪)은 무엇이며, 대혜스님이  말씀하신 묵조사선은 무엇입니까?

[이 무엇인고] 해 들어 가다가 어느  정도 화두가 잘  잡히면 희마(戱魔)가 들어와요.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지요.  '아, 이제  내가 도인(道人)이 되려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화두가 잘 되니까 기분이 좋아지는거, 이게 마구니예요.  모르는 주제에  기분이 뭐 그렇게 좋을게 있어요. 기분이 좋다고 하는 것은 기분이  동했기 때문이 예요.  생각이 동함은 벌써 사선이 되어 버려요.  

이미 죽은 선이 되어버리는데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제일 큰  잘못이고 그 다음엔 조사스님네가  도담(道談)한 것을 응용하는  거지요.  쉽게 예를 들자면, 서울이  목표인데 구포나 밀양, 대구,  대전, 수원에 와서 내려 버리는 걸  모두 묵조사선이라고 그래요. 그대로  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서울까지 도착이  될텐데 밖을 내다 보고 다 왔나보다  하고 내려 버리는 거지요. 마치  닭이 알을 품어주면 21일에 병아리가 되어서 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 전에 닭이 발톱으로 후벼 미리 나와 버리게 하는 것과 같지요. 불구자가 되어  버린 것 그것을 되진선(禪)  즉 사선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중간에 다 깨달은  줄 알고 화두에 의심이 안 되어 공부를 못 짓는 거, 그게 사선(死禪)이요,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고 그럽니다.  화두를 주거나 받거나 하는  데는 병통이 안 붙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대혜스님이  서장(書狀)을 엮었어요.  당시에 화두를 타  가지고 공부하는 이들이 병통있는 것을  대혜스님이 편지를 보내어 잡아 주었어요. 그 때 편지 문답한 것들을 결집해  놓은 것이 서장(書狀)입니다. 옛날엔 선방에 가려면  서장을 보고 가라고  그랬어요. 화두를 들 때  병통을 미리 알아야 잡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걸  전부 거꾸로 뒤집어 해석을 해서 가르쳐  주니 큰 일입니다.

 

요즘엔 선이 불교권만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고 있고, 그림이나 음악 무용등을  통해서 선을 한다고 하기도  하는 데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구경(究竟)에 이를 수 있는지요?

약간의 산란심을  쉬게 하는 기본은  되겠지만 구경에까지 이를  수는 없어요.  명상도, 그것을 해가지고는 찰라간도 망념이 쉴 날이 없어요. 명상법은 탁한 데서 맑은 데로 옮기는 작용은 해요. 그러나 견성은 못합니다. 관념이 작용하니까.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학교나 직장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구도적인 삶을 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또  불교권 밖의 다른 종교인이나  일반인들이 [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가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시는 느낌은 어떠 하신지, 그리고 선을 하는 이들에게 하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내가 본  어떤 사람은 참선  공부가 중하다는 법문을 듣고 직장 생활은 등한히 하고 여기에만 치중하여 생업을 그르치는 경우를 봤어요.  그러나 선이란 그런게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열중해야 선을  잘 할 수 있어요.  자기  일에 열심히 하고 남은 시간에 열심히  익히려 하는 자가 성과가 더 좋아요. 

누구나 생업을  등한히 하고는 무엇이든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죠.  오고 가는 시간, 사이 사이의 시간을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최상승선을 익히려고  하면 아주 편안한 상태가 될거예요.  현대를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 생각이 머리에  쉼 없어 스트레스가  쌓이잖습니까? 이런 것을 선의 입장으로 다 비워버리는 겁니다. 선이란 참으로 쉬는 시간 아닙니까? 

 이 법을 조금만 배워서 응용만  하면 아주 멋진 삶을 살 수있지요. 항상 명량하고 쾌활한 입장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좋은  생각도 떠오르고 모든 일이  잘 됩니다. 그리고 틈틈히  좌법을 익히도록 하세요. 처음엔 잘 안 될테니까 3분 정도 일주일 앉아  있다가 그 다음엔 5분, 10분씩 이렇게 시간을  늘려 가는 겁니다. 이렇게 해 나간다면 3년 안에 충분히 한 시간을 앉아 있을 수가 있어요. 

이쯤되면 전국을 다니면서 수련회도 참가하여 자연의 공기, 좋은 환경에 접하면서  견학도 하고, 이런 생활을 하면 수련회  갔다온 성과가 그대로 생활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남보다 기본적으로 좋은 생활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도를 턱 깨달아 생사도 없고  임의자재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거지요. 공안을  철저히 궁구해 반야심경의 [색불이공공불이색]의 이치를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중생들은 모두 전도몽상의 견(見)으로 보고  있어요. 정신을 못차리는 거지요.  모두 최상승선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