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선(禪)의 종류와 내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요.

답 : 선의 종류는 크게 최상승선(最上乘禪), 대승선(大乘禪), 소승선(小乘禪), 외도선(外道禪)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선이라 함은 일체 미세(微細)한 망상(妄想)도 일어나지...않는 마음을 억지로 선(禪)이라 이름합니다.

최상승선 즉 화두선(話頭禪)은 일체 헐떡이는 그런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며, 화두(話頭0자체가 본연(本然)그대로인 자세라 자기 본래면목 (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깨달음 이라고도 합니다. 요즘 " 선(禪)도 방편(方便)이다 " 하는 풍조가 있는데 물론 소승선이나 대승선은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상승선은 일체관념(一切觀念)이 붙지 않는 절대적인 그. 자리를 이른 것이기 때문에 격외선(格外禪) 또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하며, 이는 일체의 방편을 추월했다는 뜻이므로 방편이라 함은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생각이 붙어야 방편이지요. 그러나, 소승선은 관념을 통해서 무념 무상(無念無想)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이것은 큰번뇌(煩惱)만 항복받아서 들어가는 경지이고 미세한 번뇌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말해요 대승선은 최상승선과 소승선을 합해서 행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외도선은 뭐냐?그것은 나름대로 정신이나 생각을 통일한 면도 가지고 있지만 아집(我執)때문에 소승도 대승도 아닌 일체 근본 진리에는 절대로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禪)이라고 이름할 수도 없는데 요즘  널리 알려져 있는 선(단전.호흡, 요가, 명상등...)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 나름대로는 道, 진리(眞理)를 통했다고들 하지만 거의가 다 외도선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문 : 평상심(平常心)이란 무엇입니까?

답 : 평상심은 일체(一切)의 추번뇌, 세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고 직관(直觀)하는 가운데 용심(用心)이 나오는 바로 그것이 평상심 입니다. 중생(衆生)들의 추번뇌, 세번뇌에서 용심이 나오는 것은 망상심(忘想心)에서 나타나는 평상심이니 망식평상심(忘識平常心)이라 합니다.


문 : 육도윤회(六道輪廻)란 무슨 의미인지요?

답 : 생각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각(生覺)이 뒤바뀌는 것이 윤회지요. 육도 중생들은 각자의 생각의 탁한 정도에 따라 육도를 떠돌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사상(輪廻思想)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윤회를 정지시킬 때 본연도리(本然道理)가 나타남을 說하셨으며 윤회 가운데 상반(相反)된 고(苦)와 낙(樂)을 초월해서 사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문 : 깨달은 사람의 생각과 망식(忘識)으로 뛰는 중생의 생각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 깨닫고 나면 중생(衆生)의 망식은 티끌도 없고, 티끌도 없는 순수식을 선가(禪家)에서는 망식(妄識) 그대로라고 말하면 이것이 곧 보리(菩提)가 됩니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탁한 물을 증발시켜 수증기가 되었다면 탁수(濁水)와 증류수(蒸溜水)의 차이가 어떻겠어요. 증류수는 혈관에 넣어도 되지만 탁수는 입에만 넣어도 설사를 합니다. 엉뚱한 소견(所見)에 떨어질까봐 억지로 비유한 것이지 이것 또한 부족하고 맞지 않습니다.

 

문 : 화두(話頭)의 정의(定義)를 말씀해 주십시요.

답 : 화두란 입을 댈려는 생각을 일으킬 때 벌써 그르쳐 버리나. 억지로 표현하자면 진리(眞理)를 바로 드러낸 겁니다. 진리란 곧 화두(話頭)가 되며 자기본연(自己本然)이 되며 그 자리를 억지로 부처라 하고 선(禪)의 자리를 몰라 참고 한다고 해서 참선(參禪)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화두는 입도 댈 수 없는 자리니만큼 여기에 떨어지면 안 되겠습니다.

 

문 : 『無』字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요?

답 : 조주(趙州)스님의 『無』字 화두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無』어째서 『無』라 했는고? 조주스님은 어째서 『無』라 했는고? 이렇게 하는 것이 간단하고 관념도 끌고 다니지 않게 되지요. 그러나 부처님은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모두 불성이 있다 하셨는데 조주스님은 어째서 『無』라 했는고?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하셨는가? 하는『無』 字 화두법은 상대적 관념이 많이 붙기 때문에 화두정(話頭定)이 더디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허나 『無』해서 바로 의심이 되어나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 조주스님의 뜻만 찾는 자세가 되면 되지 발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 : 생사관념(生死觀念)하면, 굉장히 어렵게 들립니다. 관념을 어떻게 떨쳐버려야 되겠는지요?

답 : 다른 게 없어요. 『이 무엇인고?』하면 됩니다. 1700가지 공안(公案)중 하나의 화두만 참구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부처를 물었는데 『마삼근』이라고 했다든가『마른 똥 막대기』라고 한 본연(本然)의 자리를 바로 제시한 이런 공안(公案)을 궁구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일체의 미세 망상을 항복받을 도리가 없어요. 이러한 공안을 바로 들면 일체관념을 떨쳐버릴 수가 있으므로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또 말세일수록 중생들의 근기가 하열해서 어느 정도 생각이 통일되어 식(識)이 맑아지면 힘을 얻기도 전에 사용하므로 자칫 잘못하면 귀신(鬼神)이 접할 경우가 많아지므로 공안을 참구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기운을 절대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문 : 공안(公案)을 바로 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답 : 지금 우리가 일으키는 상대적인 생각을 버리고 절대적인 공안에 철저히 부딪쳐 보는 겁니다. '이-'할때 생각을 일으키는 그게 뭐냐 그것만 자꾸 하면 됩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처음에 화두가 의심이 안 되면, 숫자를 거꾸로 세어서 내려가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 않게 한 다음 다시 공안을 들어서 절대적인 진리인 그 자리에 바로 들면 그대로 무너져 버려요. 진리란 바로 여러분의 자신(自身)을 말합니다. 자신을 찾으려는 자세를 가지고 나아갈 때 상대망상(相對妄想)이 무너져 내리고 관념이 붙질 못해요. 부처님께서 대중 근기에 맞추어 소승선, 대승선을 설해 놓으셨지만 좀 어렵더라도 최상승선에 부딪쳐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 : 이 뭣고 화두는 '이-'만 바르게 의심하면 '뭣고'는 필요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참구하는 것이 올바릅니까?

답 : '이 뭣고?' 하는 이는 처음에 『마음이 무엇인고』『이 무엇인고』두 가지로 하다가 의심이 잡히면 『이 뭣고』로 통일하면 돼요. 허나, 『마음이 무엇인고?』『이 무엇인고?』이 두 마디를 건너가면 안 됩니다. (관념이 따라붙기 때문에 정력(定力)이 더딤) 그리고, 화두참구는 의심이 분명해야 되는 것인데. '뭣고'라는 것은 의심의 표시이니까 '이-'해서 의심이 생기면 '뭣고?'가 같이 곁들여 있는 것이므로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나, 초보자는 잘 되지 않으니까 '-뭣고'도 넣어 확실한가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 : 화두의심(話頭疑心)은 3일 또는 7일 만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까? 짧은 단위를 말하는 것입니까?

답 : 3일은 안되고 7일은 되지요. 또 짧은 단위가 아니고 시간적인 것으로 화두가 밀밀하게 이어지는 7일인데 7일안에는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7일을 넘으면서 힘을 얻는 고비가 되지요.

 

문 :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를 태고 보우국사(太古 普愚國師) 경우에는 90일이나 지속하였는데 말하자면 가을에 의심하여 봄이 되니 봄 눈 녹듯 터졌다하는데 오매일여가 낮과 밤을 동(動)하지 않고 그렇게 오래 이어집니까?

답 : 7일이면 90일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고 일주일을 넘어가면 그 경지도 수용할 수 있지요. 이때에 무르익어 확연해 집니다.

 

문 :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어떤 뜻이 있는지요?

답 : 상구보리는 자기가 먼저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그 노력만큼 남에게 알려주는 것이 하화중생입니다. 진짜 보리를 구한다면 스스로 중생을 교화하게 되는데 한쪽으로 치우쳐 보리를 구하려고 하니까 이에 중생을 교화하려는 목적 또한 나온 게지요. 본연자리에서 보면 둘이 아니어서 자기가 한 일 그대로가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는 것입니다.

 

문 : 정진(精進)을 많이 하면 꿈도 잠도 없어지고 화두만 일여(一如)하다는데 여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요.

답 : 꿈도 잠도 없어진다는 것은 망상(妄想)이 쉬는 것이고 열심히 정진하다보면 나타나는 첫 경계(境界)가 꿈이 없어지고 숙면(熟眠)을 취하는 것인데 꿈이 없어진다는 것은 생각이 쉬어 들어가기 때문이지요.

 

문 : 선지식을 만나지 않고는 억겁의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선지식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십시요.

답 : 불가(佛家)의 선지식(善知識)이란 뜻은 매우 깊어요. 선이란 생사가 없는 경지를 터득한 용(用)을 일컬으며 즉, 외도와는 달리 상대(相對)에 떨어진 게 아니라 절대성(絶對性)인 그 자리에서 나오는 용심(用心)이 바로 선(禪)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이란 뜻은 외도들은 사용하지 않거니와 설사 사용한다 해도 불가의 선지식과는 뜻이 전혀 다릅니다.

 

문 : 요즈음 사회에서는 도인(道人)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는데 도인의 개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요.

답 : 도인이란 것은 부처님 말씀을 바로 알아들을 줄 아는 실력자를 말해요. 부처님 말씀을 다 알아 들으려면 삼처전심(三處傳心)부터 팔만장경의 뜻을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경계인데, 그 뜻을 계합하지 못하고 신통을 부리는 것은 요술이지 도술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깨달아서 힘이 나는 것이 도술이고 자기 본래 마음을 깨닫지 못한 분상에서 큰 힘이 나는 것은 요술이요. 즉 관념의 세계에서 놀아나면 요술, 관념의 세계를 초월해서 생기는 힘을 도술이라 하는 거죠.

 

문 : 욕심(慾心)과 탐심(貪心)의 차이를 말씀해 주십시요.

답 : 욕심이란 하고자 하는 마음이고, 탐심이란 탁한 생각을 일으키는 경계를 말합니다. 욕심은 옳은 것은 아니지만 땅에 엎드려 있는 사람이 땅을 짚고 일어서는 것처럼 방편으로 쓰는 거죠. 그러나 부처님 법은 욕심도 붙지 않는 경계이니 지금의 하고자 하는 번뇌는 모두 항복받아야 합니다. 단지 탐심과 욕심의 차이는 하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더 탁하고 덜 탁하고 하는 데 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확연히 변하는 경계에 이를 때 하고자 하는 욕심은 전혀 없고 도(道)의 용심(用心)으로 변하는데 겉으로 들어난 용심은 하고자 하는 욕심의 작용으로 보이나 이것은 욕심과는 전혀 다릅니다.

 

문 :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은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요?

답 : 요즈음 책자나 강사들의 소견을 보면 조사선은 제일 깊은 선이고 으뜸가는 선이며, 여래선은 그 다음 가는 선이라 하여 주장하는 이가 많은데 여래선이 얕고 조사선이 깊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전등염송에 보면 과거 칠불(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의 게송이 나오는데 이 부처님들은 모두 여래선 도리(道理)로 전법(傳法)을 했는데 그렇다면 이 분들은 모두 눈이 멀었고 아직 미진(未盡)한데도 전법을 했단 말인가? 과거칠불(七佛)과 33조사(祖師)가 다 여래선도리(如來禪道理)로 인가(認可)를 했고 오도송 (悟道訟)도 그렇게 지어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근기가 약해지면서 알음알이를 덧붙여 가지고 견성을 했다고 하니까 그때부터 법을 까다롭게 굴려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래선은 얕고 조사선은 깊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것이 아니고 여래선 도리를 확연히 알면 역시 조사선을 쓰는 겁니다. 옛 스님네들의 여래선 가운데서 조사선을 쓴다는 말씀은 여래선과 조사선이 둘이 아니라는 뜻인데 "너는 여래선은 봤다마는 조사선은 꿈에도 못 봤다"고 하니까 말머리를 쫓아서 여래선은 얕고 조사선은 깊다고, 요즈음 사람들은 그릇되게 알고 있는데 이는 시정되야 합니다.

 

문 :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답 : 요즈음 사람들은 묵조선, 간화선 그러는데 묵조하는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참으로 묵조하는 것은 일체번뇌가 없는 것을 묵(默)이라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힘을 사용하는 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참으로 잠잠하려면 일체의 미세망상도 없어야 하지요. 중국의 오종(임제종, 운문종, 위앙종, 법안종, 조동종)가풍이 갈라졌을 때의 묵조는 간화(看話)나 다름없었어요. 후에 대혜(大慧)스님이 묵조를 사선(死禪, 邪禪). 귀선(鬼禪)이라고 한 것은 옳은 묵조를 친 것이 아니라 삿된 풍조에 떨어진 묵조사선을 말한 거예요. 조동종의 종장스님인 찬동굉지선사(天童宏智禪師)가 묵조명(默照銘)이라는 책을 지어 첫 번째가 묵이상조(默而常照)이렇게 나가니까 그 분의 뜻을 잘못 오인해서 요즈음 사람들이 묵조사사배(默祖邪邪輩)의 종장(宗匠)을 만들었어요. 안목이 밝은 도인 스님 네를 묵조사사배의 종장을 만들어 놨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안목이 밝지 못한 요즈음 사람들의 큰 잘 못이예요. 대혜스님이 주장한 것은 광지선사의 묵조를 친 것이 아닌데 요즈음 사람들은 묵조선하면 대혜스님이 묵조사선(默照師禪)이라고 한 표현만을 생각하고 또 굉지선사가 처음부터 묵조사선을 주장했다고 여기고 있어요. 묵조선을 이렇게만 알고 있는 이 점을 시정해야 합니다.

※ 구경각(究境覺) = 확철대오(確徹大悟) = 간화(看話) = 묵조 (默照)

 

문 : 지금 말씀하신 죽은선(死禪)은 무엇이며, 대혜스님이 말씀하신 묵조사선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요.

답 : 화두정(話頭定)이 생길 무렵에 희마(喜魔)가 동시에 곁들여 계속해 나아가다가 화두타파되어 의심(疑心)이 없는 경지를. 말합니다. 또 화두를 지어가다가 사량(思量), 복탁(卜度)해서 화두가 타파되어 의심이 없는 경지 등 여러가지 병통이 있는데 이러한 병통 등을 묵조사선(默照邪禪), 묵조귀선(默照鬼禪) 묵조사선(默照死禪) 이라고 하지요. 예를 들자면 서울가는 게  목표인데 구포나 밀양, 대구, 대전, 수원 등에 와서 서울이라고 착각하고 내리는 것을 묵조사선이라고 합니다. 그대로 타고 서울까지 도착할텐데 밖을 내다보고 다 왔는지 알고 내려버리는 경지를 묵조사선이라고 합니다. 마치 닭이 알을 품어주면 21일 만에 병아리가 되어서 나오게 되는데 그전에 닭이 발톱으로 후벼파서 미리나와 버리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을 죽은선 즉 사선이라고 합니다.그러니까, 중도에 다 깨달은 줄 알고 화두에 의심이 안 되어 공부를 못 짓는 것을 사선(死禪)또는 사선(邪禪), 귀선(鬼禪).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고 합니다. 화두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데는 병통이 안 붙을 수가 없어요. 당시에 화두를 타 가지고 공부하는 이들의 병통 있는 것을 대 혜스님이 편지를 보내어 잡아 주었어요. 그 때 편지로 문답한 것을 결집해 놓은 것이 서장(書狀)입니다. 옛날에 선방에 가려면 서장을 보고 가라고 그랬어요. 화두를 들때 병통을 미리 알아야 잡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그걸 전부 거꾸로 뒤집어 해석을 해서 가르치니 큰 일입니다.

 

문 : 재가자(在家者)가 세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 말씀해 주십시요.

답 : 팔정도(八正道)에 의지해서 살면 되요. 즉 어떻게 하면 바로 살 것인가 하고, 이에 바른 목표를 설정하고 바른 가치관을 세우는 거죠. 이렇게 하다보면 바로 자기 마음과 계합하게 되고 바른데 계합한 것이 바로 도통(道通)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