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신 남산 정일 큰스님은 여덟 살 되시던 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슬픈 눈망울을 본 이후 생사에 대한 큰 의문을 품게 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려운 집안을 돌보며 지내시다가 어느 날 고서점에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을 발견하시고, 뜻도 모르고 수십 번 되풀이해 읽으셨다고 한다.

조계사로 출가하여 1958년 금오 선사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수계하신 스님께서는 은사 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구례 화엄사로 가시면서 사중에서 쓸 양곡을 마련하기 위해 진주까지 걸어서 탁발 행각을 하셨다. 화두가 일념으로 지속되어 동네 골목길로 잘못 들어가신 적이 무수히 많았다.

이후 망월사에서 천일기도를 시작하신 스님께서는 졸음을 쫓기 위해 매일 새벽 두 시에 냉수욕을 하셨다. 그렇게 오백일 동안 냉수욕을 계속하자 냉기가 뼛속 깊이 파고 들어와 소화가 안 되는 등 냉병이 생겨났다. 여름에도 화롯불을 지피고 구운 기와를 한참 동안 배에 대고 있어야만 소화가 될 정도였다. 그 일로 인해 지나친 고행은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아시고, 나머지 오백일 동안은 냉수욕을 삼가셨다.

천일기도를 마치고 나서 다시 선가귀감을 읽는데, 그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왔다. 머릿속에서 무성하던 번뇌가 일시에 떨어져 나가 잠잠해졌다. 번뇌가 떨어져 나가자 몸과 마음의 도리가 바르고 착해져서, 부처님께서 ‘착하다’라는 말씀을 자주 쓰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님께서는 경계가 바뀐 것으로 이해하시고 점검받기 위해 해제 후 전강 선사를 찾아갔다. 스님께서 경계를 이르시니 전강 스님은 일원상(一圓相)을 그리시고는 ‘입타야 불타야(入打也 不打也)’ 공안을 물으셨다. 스님께서 걸망을 지고 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시는 시늉을 하자 전강 선사께서는 주장자로 어깨를 한 번 치셨다. 이에 스님께서 ‘무엇을 치셨습니까?’라고 하시자 전강 선사께서 재차 주장자로 때리셨다. 스님께서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답하니 전강 선사께서 다시 치셨다.

이렇게 여러 차례 주장자로 때리신 후 전강 선사께서는 방법을 바꾸시어 ‘의리(義理)로 일러보소’라고 하셨다. 스님께서 ‘의리’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 꽉 막혀 잠자코 있자, 전강 선사께서는 공부를 다시 지으라고 하셨다.

전강 선사의 질문으로 인해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화두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바른 선지식의 점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무치게 깨달으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전강 선사 곁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시고 범어사에서 3년, 인천 용화사에서 3년, 수원 용주사에서 3년 등 전강 선사 문하에서만 약 10년간 수행 정진하셨다.

그 후 화엄사 구층암에서 수행정진하시고, 해인사 선원장을 거쳐 통도사 극락암 등에서 안거를 성만하셨다. 공부 도중 홀연히 마음의 눈이 열려 현실경계 그대로가 실상이고 열반인 도리에 계합(契合)하시고 게송을 읊으셨다.

극빈자는 이슬 맺힌 갈대숲이 좋다

홀연 한 가닥 시광이 온 대지를 투과하니

만년전사 부처님 열반이 드러났네

極貧者喜歡帶露的蘆葦叢

渾然間一縷始光透過整個大地

萬年前事佛已涅槃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슬픔과 같이

전인미답지가 궁금하느냐?

잔물결 이는 개울로 가서 세수나 하거라

霧雨下着霧雨下着

最後如告別時的傷痛

對前人未踏地掛念呼

到靜靜地泛着水波的

小溪去洗一把??

1979년, 스님께서는 북한산 자락에 도량을 건립하기로 원력을 세우시고 사찰명을 보광사(普光寺)라고 명명하시는 한편, 1987년 관음전 불사를 필두로 요사채를 세우셨고,1990년 보광선원,1993년 대웅전을 조성하셨으며, 2004년에는 회관 불사를 이루어내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보광사를 중심으로 도심 포교에 전념하시는 한편, 보광선원을 개설하여 조실로 주석하셨다. 또한, 불교의 정맥을 이어오는 데 큰 역할을 한 대한불교조계종의 모체(母體) 선학원 원장(1983~1985)을 역임하셨고, 1992년부터 선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하시면서 부처님 정법(正法)을 수호하셨다.

보광사의 ‘교육 프로그램’은 엄격하고 철저했다. 입문자들은 먼저 광명진언은 하루에 1천 번씩 21일간 외우고 천도재를 지낸다. 그런 다음 지장경 300독, 금강경 100독, 관세음보살보문품 100독, 선가귀감 50독, 원각경 보안보살장 300독, 법화경 30독을 하면서 사이사이 천도재를 지내고, 선가귀감을 다시 50독 하는 것으로 일차 과정을 마무리한다.

스님께서는 대중과 함께 하시면서 염불, 간경, 참선 등 원효대사께서 보이셨던 통불교적(通佛敎的)인 수행 방법을 통하여, 일체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보살의 삶을 살도록 대중들을 이끄셨다.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육바라밀법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도록 하셨으며, 설법을 하실 때마다 이를 강조하셨다.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고루 갖추시고 바르고 곧으며 따뜻한 성품을 지니신 남산 정일 선사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북한산 자락의 청정도량 보광사에서 일체 중생과 더불어 동고동락(同苦同樂)하셨다.

스님께서는 어느 날 시자를 불러 이렇게 이르셨다.

“이제 갈 곳 없는 곳을 가야만 한다.”

“어디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창문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거라.”

不能去的也要去

?到底要去何方

打開?戶看一看

때는 불기 2548년 음력 7월 23일 새벽 5시 44분이었다. 세수 73세 법랍 47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