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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그는 무역업으로 한때 세속의 부와 명예를 누렸으나 IMF를 맞아 운명에 내동댕이침을 당하고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낙산 홍련암 등 전국의 유명 기도처를 오가며 부처님께 매달렸다.

 그러던 중 서울 보광사의 정일 큰 스님을 만나 화두를 받고 용맹정진, "나의 본래면목이 바로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임을 깨치고, 큰 스님으로부터 "여래를 보았지만 조사선의 차별지를 둟어야 한다"는 평가를 들었다.

  "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와 파자소암(波子燒庵)의 두 동안을 다 통과하면 재가로서 신라의 부설거사 이래 1,300년 만에 확철대오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다시 정진을 계속, 3년 만에 관문을 뚫고 "조주여, 천 년 살림살이 오늘 나에게 들켜 버렸구나!"라고 힘차게 외쳤다.

 정일 큰 스님으로부터 면밀히 점검받은 이후 "눈 밝은 사람은 속일 수가 없구나. 부처님도 불법이 이러하고 역대 조사도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고 자네 또한 이러하기에 전할 수 없는 법을 자네에게 전한다"는 말씀과 함께 인가를 받았다.

이후 귀향하여 경남 김해에서 바라밀선원을 열고 법을 전하고 있다.

여러 눈 밝은 선지식들이 법문을 하는 것은, 무명(無明)에 빠져 헤매는 이들을 반야(般若) 위에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등불이 되어 어둠을 밝히고 밀알이 되어 열매를 거두고자 함입니다.

불교의 요체(要諦)는 내 마음의 주인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마음(心)을 도(道)라고 하고, 진리(眞理)라고 하고, 법(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착하다”는 말씀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일체 모든 번뇌를 벗어난 경지를 말합니다. 그러면 착하지 못하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번뇌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중생의 상태입니다.

번뇌망상을 경전 말씀으로는 ‘망식(妄識)’이라고 합니다. 망령된 알음알이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중생이고, 망령된 알음알이를 초월한 경지를 부처님이라 합니다. 참으로 착한 상태이고, 진리와 계합한 상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참으로 착해지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순수한 경지를 말하고, 참으로 순수해야 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로 모든 좋은 법을 길러낸다”고 하셨습니다. 또, “믿음은 슬기로움의 공덕을 더 늘릴 수 있다. 믿음으로 반드시 여래의 땅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오직 이 일대사만이 진실이요 나머지 이승(二乘)과 삼승(三乘)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바짝 정신을 차려 이 참선 공부를 소홀히 하시면 아니됩니다. 세간의 일도 다만 이것일 뿐입니다.

옛 말씀에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종요로이 마음길이 끊어져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참선이란 말할 것도 없이 활구선(活句禪)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활구선이라야 조사선을 뚫을 수 있고 마음길이 끊어져 확철대오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 가운데 말이 있는 것을 사구(死句)라 하고, 말 가운데 말이 없는 것을 활구(活句)라 합니다. 모름지기 말에 떨어지지 말고 활구를 깨쳐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수행인들은 능히 진정한 스승과 벗을 찾아 도의 안목을 결택하지 못하고 남의 힘만 믿고 의지하며 한결같이 외워 지니면서 부처님이 구제해 주기를 바랍니다. 공이 지극함에 이르러도 모두 마구니에게 포섭되곤 하는 것을 내가 듣고 보게 됩니다. 그 허물을 내가 지적한 경우도 수없이 많습니다.

수행자들이 참선은 하지 않고 모두가 방편설에 미혹되어 일생을 그르치니 슬프고 슬픕니다. 참선자는 밖으로 매달린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어야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방편입니다. 방편을 빌려서 들어가면 옳지만 방편에 끄달려서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병이 됩니다. 왜냐하면 방편이 알음알이요 알음알이가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곳곳에서 공부를 모르는 무리들이 다만 방편에 끄달려서 이를 버리지 못하고 실법(實法)인 양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착각(錯覺) 도인(道人)들 때문에 공부하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 적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요즘 시대는 마(魔)는 강하고 법(法)은 약하여 맑다는 생각을 가지고 맑은 데에 합하여 드는 것으로써 구경(究竟)을 삼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방편에 끄달려서 그것을 버리지 않고 자칭 종사(宗師)가 되는 자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삿된 무리들은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인 행세를 합니다.

깨달음은 없다고 말하는 자,

무엇이든 주인공에게 맡기라는 자,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하는 자,

화두도 방편이라고 말하는 자,

“이~뭣꼬” 화두를 하면서 생각 이전을 관하라고 말하는 자,

임제종(臨濟宗) 간화선(看話禪)과 조동종(曹洞宗) 묵조선(默照禪)이 다르다고 말하는 이들은, 모두 뜻을 보지 못하고 말머리에 떨어진 자입니다.

또 임제종에는 빈주구(賓主句)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

체(體), 상(相), 용(用)을 모르는 자,

“이~뭣꼬”는 화두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는

모두 다 1천 년 전부터 모두 멍텅구리 사도(死道)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간략히 조사의 가르침들을 인용하여 보았거니와 한결같이, 이(理)와 사(事)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어찌 감히 부처님의 본뜻을 멸하여 금문(金文)을 헐며 편견에 빠져서 원지(圓旨)를 손상 하겠습니까?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삼장(三藏) 속에서 요긴한 구절을 뽑아 불법(佛法)의 진수(眞髓)와 활구선(活句禪)의 요체(要諦)를 밝힌 것입니다.

모든 부처와 조사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인 신통과 삼매와 삼현(三玄)과 삼요(三要)와 종종차별지(種種差別智)와 모든 걸림이 없는 지혜가 다 이를 좇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여러분의 자신(주인공)입니까?

여러분은 내 말을 분명히 듣고서 귀감으로 삼고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불교의 진면목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 있으며

    배움이 아니라 배울 수 없음에 있으며

    가르침이 아니라 가르칠 수 없음에 있으며

    언어 문자가 아니라 언어 문자가 끊어짐에 있으며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있으며

    앎이 아니라 깨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불법은 생각이나 분별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견성 성불한 부처만이 알 수 있음을 설했던 것입니다. 모든 부처와 조사가 한 법도 사람에게 주심이 없습니다. 다만 당사자가 스스로 믿고 스스로 긍정하며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닫게 할 뿐입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도 이렇게 경계하였습니다.

 말만 배우는 무리들은 말할 때에는 깨친 듯하다가도 실제 경계에 당하게 되면 도리어 미혹하게 되니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긴 자로다. 만일 생사를 막아내려면 모름지기 이 한 생각을 탁 깨뜨려야만 비로소 생사를 요달하리라.

이럴진대 만약 참되고 바르게 참선하여 불도를 배움이 없으면 어떻게 생사의 업력을 대적하겠습니까 ?

깨친 경계에서 보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존재의 무상함이 살아 있는 진리의 모습이지만, 참나를 깨닫지 못한 범부 중생의 경계에서 보면 살아 있는 진리의 모습이 바로 무상한 것입니다.

깨친 부처와 조사의 경계에서는 무상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지만, 깨치지 못한 범부 중생의 경계에서는 영원 속에서 무상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깨닫지 못한 범부 중생의 입장에서는 무상을 철저히 느껴서 대발심을 하는 것이 생사해탈의 첫걸음이며 참선 수행의 밑바탕이 됩니다.

그러므로 불법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정법(正法)이 융성해야 하고, 정법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바르게 닦고 바르게 깨쳐서 바른 눈을 가진 도인(導人)이 나와야 합니다.

바른 눈[佛眼]을 가진 도인이 나와야 일체 중생이 바르게 눈을 뜨며, 일체 중생이 바르게 눈을 떠야 사바세계가 불국토로 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