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는 자신의 본래면목이자 실상

  

 

 7월 22일 이른 아침, KTX를 타고 달려간 김해시 장유면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 황후의 남방불교 전래설을 간직한 불모산(佛母山)이 우뚝한 곳이었다. 그 아래 자리 잡은 바라밀선원(055-314-0116)은 여느 시민선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법당, 선방, 사무 공간 등을 갖춘 300여 평의 도량이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학원 이사장을 지낸 정일(正日ㆍ1932~2004) 선사로부터 인가받은 선원장 능허(能虛ㆍ53) 거사가 직접 화두참구를 지도ㆍ점검한다는 점이 달랐다. 특히 능허 거사는 재가자는 물론 스님들과의 법거량도 마다하지 않아서 선객(禪客)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터였다. 지난 달 <이제는 반야의 노래를 불러라>라는 구도기를 펴내 더욱 입소문을 타고 있는 그로부터 수행담을 들어보았다.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능허 거사는 무역업으로 한 때 풍요롭게 살았지만
IMF사태를 맞아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내의 권유로 마음고생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전국의 유명 기도처를 오가며 부처님께 매달리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98년 서울 보광사 조실 정일 스님을 만나 ‘무(無)자’ 화두를 받고 참선에 입문했다. 막다른 골목에서 참선 외에는 따로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용맹정진한 지 불과 1년 만에 “나의 본래면목이 바로 청정법신비로자나불”임을 깨쳤다고 한다.

그러나 정일 스님은 “여래를 보았지만 조사선(祖師禪)의 차별지(差別智: 가지가지 공안을 투과하는 지혜)를 뚫어야 한다”며 “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와 파자소암화(婆子燒庵話) 두 공안을 통과하라”고 점검해 주었다. 그는 다시 정진을 계속, 비로소 3년 만에 관문을 뚫고 “조주여, 천 년 살림살이 오늘 나에게 들켜버렸구나”라고 힘차게 소리쳤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낙엽 하나가 내 발 앞에 떨어졌다. 바로 그 순간,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었다. 밤하늘 밝은 달을 쳐다보니 고향땅에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곧바로 정일 스님으로부터 면밀히 공안으로 점검받은 후 “눈 밝은 사람은 속일 수 없구나. 부처님도 이러하고 역대 조사도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고 자네 또한 이러하기에 전할 수 없는 법을 전한다”는 말과 함께 인가를 받았다.

2004년 귀향, 바라밀선원을 열어 본격적인 간화선 대중화에 나선 능허 거사로부터 ‘이뭣고?’를 중심으로 화두공부의 요체에 대해 인터뷰했다.

-‘이뭣고?’란 한 마디로 뭡니까?
‘이뭣고?’와 ‘무(無)’는 그대로 드러난 구(句)이다. ‘이뭣고?’라는 놈은 밝기가 광명보다 더 밝고, 어둡기는 칠흑 보다 더 어두운 바로 그놈이다. 부처님 마음자리이자 각자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자 실상(實相)이다.

-화두에 의심이 잘 들지 않을 때, 공부 요령은?
‘이뭣고?’할 때 ‘이~’하면 곧바로 본심이 드러난다. 이때 안으로 비추어 보면 자신이 본심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알 수 없는 의심만 뒷받침해 주면 된다. 안으로 자꾸 비추어 보면 자기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분명하므로 의심이 따라붙어야 함에도 도무지 의심이 안 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체 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하고 생각을 일으키는 그 놈이 무엇인지, 그 주인에 대해 회광반조(回光返照)하라고 일러주건만, 그 알음알이 때문에 잘 안 된다. 천만 가지 망상이 바글거리다가도 ‘이뭣고?’ 언구만 바로 지어 들어가면 일체망상이 붙지 못한다. 일체 공안을 그렇게 공부하면 된다.

-조사선에서 말하는 일구(一句)란?
일구(一句)는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를 곧바로 가리킨 말이다. 일체 번뇌가 없는 자리를 가장 가깝게 표현했다고 하여 일구라 하지만, 절대적인 경지는 언어를 통해 가르칠 수 없다. 진언(眞言: 진리의 말)은 불출구(不出口: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이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나오면 그것을 설명하는 방편, 즉 이구(二句)가 된다. 일구는 가불(假佛: 형상과 명칭, 개념 등의 거짓 부처)을 때려 부수는 소식이다. 가짜 부처를 때려 부숴야 진불(眞佛: 법신불, 참마음)이 나타난다.

-평상심이란 어떤 심적 상태인가요?
일구(一句)가 평상심이다. 번뇌 없이 생활하는 도인들의 일용지사(日用之事)는 깨달음 아닌 것이 없다. <금강경> 첫머리에 나오는
여시아문(如是我聞: 이와 같이 들었다)에서 부좌이좌(敷座而坐: 자리를 펴고 앉다)까지가 그대로 일구이며 평상심의 도리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보이신 일거일동이 그대로 선(禪)이다.

-여래선과 조사선은 어떻게 다릅니까?
부처님의 49년 설법은 여래선의 도리로서 체(體)와 용(用)을 나타낸 것이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중생이 어리석어 바로 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손가락에 매달리는 허물이 있다. 하지만 본뜻은 여래선과 조사선이 둘이 아니다. 방편 밖에 따로 전한 격외(格外)의 도리인 조사선이 차별지라면, 여래선은 평등지(平等智)가 된다. 조사선에는 최초구(最初句)와 말후구(末後句)가 있는데, 말후구는 격외의 소식이라서 완벽히 화두를 투과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다.

-깨닫고 나서도 ‘이 뭣고?’는 깨닫기 전과 같은가, 다른가?
‘이뭣고?’는 깨달아도 ‘이뭣고?’이다. 그러나 할(喝)!


김해=김성우 객원 buddhapia5@daum.net(기자)